변화는 정말 어려운 걸까?



 우리 모두는 변화를 꿈꾼다. 변하지 않으면 살아남지 못한다는
사회분위기 속에서 변화를 원치 않는 사람은 별로 없을듯 하다.
성공적이고 행복한 삶을 위해서도 변화는 필수다. 누군가는
더 날씬한 몸매를 가지기 위해 다이어트를 시도하고, 누군가는
새벽에 일어나 영어공부를 시도한다. 또다른 누군가는 자신만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계획을 세우고 매일매일 실천을 시도한다.

 그러나 대부분의 변화는 실패로 끝난다. 대부분의 다이어트는
실패하고, 새벽 영어공부는 작심삼일로 끝난다. 새해에 세운
거창한 계획은 한 두달만 지나도 잊어버리기 일쑤다. 도대체
왜 대부분의 변화는 실패로 끝날까? 변화란 원래부터 어려운걸까?
(나 역시도 매주 한편의 글을 블로그에 올리겠다는 결심을
잊은지 오래다ㅠㅠ)


 '스위치'의 저자인 칩 히스와 댄 히스는 변화가 항상 어려운 것만은
아니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결혼이나 출산과 같이 엄청난 변화를
즐거운 마음으로 기꺼이 받아들이는 것만 보아도 모든 변화가
어려운 것은 아니다. 

 물론 우리 삶에서 대부분의 변화가 어려운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우리가 변화에 대한 관점과 방법을 바꾼다면 변화를 '조금 더 쉽게'
만들수 있다고 저자는 이야기한다. (저자는 변화를 '쉽게' 만들수 있는
완벽한 방법은 없다고 고백한다. 하지만 '조금 더 쉽게' 만드는 것만
해도 어딘가?)

 우리가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단순히 하나의 방법만을 취해서는
안된다. 변화를 일으키기 위해서는 세 가지를 동시에 해야 한다.
기수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코끼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환경'을 조성하라!

 


 저자는 책의 전체적인 흐름을 조나선 헤이트의 '행복의 가설'에서
소개된 '코끼리와 기수' 비유를 사용해서 이끌어 가고 있다.

 "우리의 감성적 측면이 코끼리라면 이성적 측면은 거기에 올라탄
기수이다. 코끼리 위에 올라탄 기수가 고삐를 쥐고 있기 때문에
리더로 보인다. 그러나 기수의 통제력은 신뢰할 수 없는 부분이다.
코끼리와 기수의 의견이 불일치 할 때면 항상 코끼리가 이긴다."

 우리는 다이어트를 위해 이성(기수)적으로는 눈앞에 있는 초코쿠키를
먹으면 안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우리의 감정(코끼리)은
초코쿠키의 달콤함을 떠올리며 먹으라고 아우성을 친다. 그리고
대다수의 사람들은 몇분간의 사투 끝에 초코쿠키를 집어든다. 
코끼리가 이긴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삶에서 매일 일어나는 싸움이다.

 변화의 방향은 기수가 쥐고 있다면 변화의 원동력(에너지)는 코끼리가
쥐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를 위해서는 이성적 측면(기수)뿐만 아니라
감성적 측면(코끼리)에도 호소해야 한다.



 대부분의 자기계발 컨텐츠는 감성적 측면, 즉 동기부여에만
초점을 맞추고 있다. 강연을 듣거나 책을 읽을 때는 무엇이든
할 수 있을것만 같고, 하고 싶은 감정이 솟구쳐 오른다. 변화를
위한 에너지는 충분히 생겨났고, 코끼리를 움직이도록 호소
하는데는 성공한 것이다.

 그러나 실천의 단계에 이르는 순간 방향을 잃고 헤매게 된다.
꿈을 가지고 노력하라고 하는데, 꿈을 찾으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노력한다는 것은 정확히 무엇을 하라는 건지 도대체 모르겠다.
변화를 위한 에너지는 생겨났는데 방향을 잃고 빙빙 돌기만
하는 꼴이다. 자기계발을 위한 시도는 대부분 이렇게 끝이 난다.

 코끼리에게 감정을 부여함과 동시에 기수에게 명확한 방향을
제시해야 한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명확한' 방향이다. 단순히
'열정을 가지고 매일매일 노력해라!'와 같은 메시지는 명확하지
않다. 명확하지 않은 메시지는 기수를 지치게 하고, 제자리에서
빙빙 돌게 만든다. 그리고 대부분의 자기계발 컨텐츠는 이와 같은
한계를 뛰어넘지 못하고 있다. (개인적으로 구본형의 '필살기'와 
같은 책이 한계를 뛰어 넘었다고 생각한다.)

 변화를 위해서는 기수와 코끼리 모두에게 호소해야 한다.
기수에게만 호소하면 이해는 하되 움직이지는 않을 것이다.
코끼리에게만 호소하면 움직이되 방향을 잃고 헤맬 것이다.
기수와 코끼리가 함께 움직일 때 비로소 변화가 일어나게 된다.
그리고 여기에 더해 마지막으로 한 가지가 더 있다. 이 책의
통찰력이 가장 빛나는 대목이다. 바로 '환경'이다.


 우리가 그동안 변화에서 간과하고 있었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바로 '환경'이다.
인간은 스스로를 지나치게 과대평가하고 있다.
물론 때때로 인간은 불굴의 의지를 발휘하기도 한다. 그러나 
일상에서 우리는 끊임없이 타협하고 합리화하는 나약한 의지의
소유자다. 그래서 그만큼 변화를 위한 환경을 조성하는 것이
중요하다. 인식하지 못하고 있을 뿐 우리는 사소한 환경의 변화에
큰 행동의 변화을 일으킨다. 

 책의 사례로 등장하는 한 여대생은 졸업파티에 드레스를 입고
가기 위해 살을 빼기로 결심한다. 그리고 온갖 다이어트 방법을
시도하지만 모두 실패한다. 그러나 마지막으로 시도한 아주 사소한
환경의 변화를 통해 다이어트에 성공, 드레스를 입고 졸업파티에
갈 수 있었다.

 그것은 바로 집안에 있는 모든 그릇을 작은 사이즈로 바꾼 것이다.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큰 그릇에 담으면 많이 먹고, 작은 그릇에
담으면 적게 먹는다. 우리가 의식적으로 먹는 양을 조절할 수 있다고
믿지만 대부분 어떤 그릇에 먹느냐에 큰 영향을 받는다.

 코끼리와 기수에 호소하더라도 환경이 조성되어 있지 않으면
변화에 실패할 가능성이 높다. 반대로 코끼리와 기수에 호소하지
못하더라도 환경이 조성되어 있다면 변화에 성공할 가능성이 높다.
그만큼 우리가 간과하고 있지만 환경의 영향이 큰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아침에 일어나는 것이 참으로 힘들다. 잠을
좋아하기도 하지만 아침에 출근하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스스로를
통제하는 것이 진짜 어렵다. 하지만 생산성 측면에서 봤을 때
아침에 일찍 일어나는 것이 나에게는 진짜 중요하다. 그래서
아침마다 일찍 일어나기 위해 사투를 벌인다. 

 나는 같이 사는 친구와 집 안에 텐트를 쳐놓고 그 안에서 잔다.
집 안이지만 뭔가 야생의 느낌이 나는 것 같아서 그렇게 산다.
하지만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따뜻하고 안락한 공간안에 있으니
그 곳에서 탈출하기가 참으로 어렵다. 그래서 최근 들어 텐트
밖에서 잔다. 그리고 자기 전에 '내일 아침에 눈을 뜨면 샤워를
해야지'라고 생각한다. 다른 건 생각하지 않는다. 해야 할 일을
생각하면 아침에 일어나기 더 힘드니까.

 여전히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힘들지만 이렇게라도 환경을
바꾸니 조금의 효과는 있다. 그리고 그렇게 일어난 덕분에 오늘
아침에 그동안 미뤄왔던 글을 이렇게 블로그에 올릴 수 있게
되었다.

요약하자면,
기수에게 '방향'을 지시하고, 코끼리에게 '동기'를 부여하고,
'환경'을 조성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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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제대로 보고 있는 걸까?

<상황 A>
평소에 보고 싶었던 뮤지컬 공연 티켓을 5만 원에 구입했다.
그런데 극장 매표소에서 지갑을 확인하니 오는 도중에 티켓을
분실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극장에는 잔여 티켓이 남아 있고
지갑을 확인하니 티켓을 살 만큼의 돈이 들어 있다. 5만 원을
주고 다시 티켓을 구입하겠는가?


<상황 B>
평소에 보고 싶었던 뮤지컬 공연을 보기 위해 극장으로 향했다.
극장에 도착하여 티켓을 구입하려고 지갑을 열어보니 오는 도중에
현금 5만원을 분실했음을 알게 되었다. 현재 극장에는 잔여 티켓이
남아 있고, 지갑에는 표를 살 만큼의 돈이 남아 있다. 5만 원을 주고
티켓을 구입하겠는가?




연구에 따르면 다수의 사람들이 A의 경우에는 표를 사는 데 주저하지만

B의 경우에는 흔쾌히 표를 산다. 두 경우 결국 주머니에서 10만원이
빠져나간다는 점에서는 똑같다. 그러나 결과적으로는 같지만 미묘하게
다른 두 상황은 심리적으로 큰 차이가 있다.

A의 경우 사람들은 '뮤지컬 공연비'라는 항목에 10만원이나 지출되는
것으로 받아들인다. 따라서 '뮤지컬 보는데 10만 원이나 쓰다니'라고
생각하여 표 구입하기를 주저하게 된다.
반면 B의 경우 분실한 현금 5만원과 표를 사는데 드는 5만원을 별개의
항목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표 한장에 10만원을 지출한다는 생각을
하지 않게 된다. 

결국 현상을 두고 어떤 관점을 가지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이 달라지고
그에 따른 행동이 달라지게 된다. 심리학에서는 이처럼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관점, 마음의 창을 프레임이라고 이야기한다.

 '프레임(21세기북스)'의 저자 최인철 교수는 우리가 세상을 바라보는
마음의 창인 '프레임'에 대해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는 프레임이라는 마음의 창을 통해 보게 되는 세상만을 볼 뿐이다.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사실은
프레임을 통해 채색되고 왜곡된 세상을 경험하고 있는 것이다." 


'보고 싶은 것만 본다'는 말처럼 같은 현상을 보고도 사람마다 서로 다른
프레임으로 받아들인다. 한쪽 진영에서는 '테러리스트'라고 부르는 사람을
반대편 진영에서는 '자유의 전사'라로 부른다. 누군가는 낙태를 '선택의
권리'(찬성) 라고 말하지만, 다른 누군가는 '생명의 권리'(반대)라고 말한다.

이렇게 우리는 세상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인식하기보다는 자신의
마음의 창인 프레임을 통해 자신만의 관점으로 인식한다. 그리고 우리
각자의 프레임 역시 항상 일관되지 않고 사소한 변화에 따라 시시각각
변한다. 위의 상황에서도 결과적으로는 같지만 사소한 상황의 차이가
다른 프레임을 만들어냈고, 결국 다른 행동으로 이어졌다.


최인철 교수는 책에서 '프레임으로 인한 이러한 마음의 한계에 직면할 때
경험하게 되는 절대 겸손, 이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다.'라고 말하고 있다.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과연 자신이 제대로 보고 있는지를
의심하는 것 자체가 지혜의 출발점인 것이다. 

우리는 정답이 있는 문제를 빨리 푸는 사람을 똑똑하다고는 하지만
지혜롭다고 하지는 않는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 문제에 대해 좋은 답안을
제시하는 사람을 우리는 지혜롭다고 한다. 정답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은
보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프레임, 서로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사람들마다 서로 다른 프레임을 가지고 있음을 인식하여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프레임으로 바라보고 생각하는 사람, 그로 인해 다양한 사람들의
관점과 생각을 묶어내 올바른 답안을 제시하는 것을 두고 우리는 지혜롭다고
표현한다.

세상을 완벽하게 있는 그대로 인식하는 것은 불가능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적어도 자신이 보는 것이 전부가 아님을 인식하는 것, 과연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는가라는 의문을 가지는 것이 지혜의 출발점이다. 

보는 것에서 생각이 시작되고 행동으로 끝난다. 결국 얼마나 제대로 보고 
있느냐에 따라 생각의 넓이와 깊이가 결정되고, 올바른 행동으로 이어진다.
모든 것은 보는 것에서 시작한다. 그럼으로 나 자신이 과연 세상을 제대로
보고 
있는지 끊임없이 묻는 것이 지혜에 한발 더 다가서는 길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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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의 의미는 없다




 인간은 왜 태어날까? 민족 중흥의 역사적 사명을 실현하기 위해?
뭔진 모르겠지만 나에게 주어진 꿈과 미션을 이루기 위해?
어쨌든 나의 생각은 '그냥, 아주 우연히 태어난 것뿐이다.
고로 나에게 주어진 삶의 의미나 사명 따위는 없다!'



 내가 세상을 바라보고 이해하는데 가장 큰,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것은
바로 '진화론'이다. 진화론이라고 하면 우리는 생물 교과서에서 봤던
그림을 떠올린다. 그리고는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했다라는 사실을
기억해낸다. 하지만 인간은 원숭이에서 진화하지 않았다. 인간과 원숭이는
같은 조상을 가지고 있을 뿐이다.  

 생명의 기원에 관해서는 여러 주장들이 있지만 수십억 년전, 아주 단순한
세포 형태의 최초의 생명이 우연히 탄생했다. 그 후 지금까지 수십억 년의
진화를 통해 천만종이 넘는 생명체로 분화했다. 하나의 단순한 시작에서
인간처럼 복잡한 생명까지 진화한 것이다. 
(물론 인간이 진화의 정점에 있는 것도 아니고, 만물의 영장도 아니다.
 끝없이 갈라진 진화의 가지 중 하나일 뿐이다.)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의 목적은 단 두가지다. '생존'과 '번식
이 두가지 이외에 인간에게만 주어진 거창한 삶의 의미는 없다.
인간에게 삶의 의미가 있다면 인간과 유전자가 98.8%가 동일한 침팬지에게도
삶의 의미가 있어야하고, 96%가 동일한 쥐에게도 삶의 의미가 있어야 한다.

 생물학자 스티븐 제이 굴드는 그의 저서 <생명, 그 경이로움에 대하여>에서
만일 우리가 지구의 역사가 담긴 영화를 다시 돌린다고 할 때 '마지막 장면에
우리 인간이 또다시 등장할 확률은 거의 0에 가깝다'
고 설명했다.
진화란 '우연에 기초한 다양성의 증가'이기 때문에 진화의 과정에서
인간이 생겨난 것도 아주 우연이고, 내가 태어난 것도 아주 우연이다.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다. 고로 태어날 때 주어진 삶의 의미는 없다.


 인간은 진화의 과정에서 뛰어난 두뇌를 얻었다. 이로 인해 생각할 수 있는
능력을 얻었고 스스로에게 삶의 의미를 물을 수 있는 존재가 되었다.
누군가는 진화론적 관점에서 세상을 바라보면 삶에 회의가 느껴진다고도
한다. 우리가 태어난 이유가 오로지 '생존'과 '번식'이라면 다른 생물들과
다를게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미란 자신이 부여하기 나름이다. 어차피 아무런 의미가 없기 때문에
자신이 삶에 어떤 의미를 부여하느냐에 따라 자신이 원하는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갈 수가 있다. 나는 개인적으로 진화론적 관점으로 세상을 바라본 후
오히려 조금의 여유가 생겼다. 뭔진 모르겠지만 나에게 주어졌을것 같은
삶의 의미를 찾아야 하고, 혹시나 그것을 찾지 못하고 실현하지 못해서,
죽을때 후회하면 어쩌나 하는 걱정따위는 할 필요가 없으니까.



 인간이 생겨난 것 자체가 우연이고, 내가 태어난 것도 역시 우연이다.

때문에 처음부터 정해진 삶의 의미나 정답은 없다. 그러니 적어도
나의 삶이 틀릴 일은 없다. 그냥 내 스타일대로 내가 원하는 삶의 의미를
만들어 가면 되는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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